해병대로고 태극기

해병대7대작전

  • 7대작전 선정 경위
  • 통영상륙 작전
  • 경인지구 작전
  • 도솔산지구 작전
  • 김일성/모택동
    고지 작전
  • 장단지구 작전
  • 양도 작전
  • 짜빈동 작전




▶ 해병대 7대작전 선정 경위

해병대는 6.25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3월, 해병대의 명예를 드높인 주요 전투를 역사에 길이 기리고자 해병대 5대 작전(통영상륙작전, 경인지구작전, 도솔산지구전투, 김일성/모택동고지전투, 양도작전)을 선정하였다. 베트남에서 개선한 1973년 7월에는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자빈동작전을 추가하여 6대작전으로 변경하였으며, 1990년대 들어 참전 원로들이 오늘날 판문점 일대를 끝까지 지켜낸 장단(사천강)지구에 대한 재고찰을 요구함에 따라 역대 해병대사령관 회의 및 현역과 예비역의 공청회 등을 거쳐 2002년 4월 8일, 장단(사천강)지구전투도 주요 작전에 포함시키기로 의결함에 따라 해병대 7대작전으로 변경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주요 작전을 선정한 기준은 아래와 같다.


1. 아군 전세 전환, 전승의 계기에 기여한 전투
2. 심리적 차원으로 국민을 고무할 수 있는 전투
3. 해병대 역사와 전통 수립에 귀감이 될 수 있는 전투
4. 해병대 특징적 전투, 혁혁한 전과 획득한 전투
5. 고려요소 : 규모, 작전의의, 기여도, 상훈 등
▶ 통영상륙 작전(1950.8.17 ~ 9.22)

▲ 작전 배경
    · 낙동강 전선 피아 대치로 북한군 마산, 진해, 부산 진출 곤란
    · 북한군 거제도 점령으로 마산, 진해항 봉쇄 기도
    · 통영을 선점하여 적 사정거리의 마산, 진해를 보호
    · 북한군 6사단 전투력 저항

▲ 참가 부대
    · 해군
        - 해병대 : 김성은 부대(2, 3, 7중대 500명)
        - 해 군 : 함정 7척( PC-703, 901, 512, 302, 307, 평택호)
    · 적군 : 북한군 7사단 예하 1개 대대

▲ 작전 경과
    · 북한군 7사단 370명이 고성-통영 방향 공격
    · 통영 관문인 원문고개에서 경찰 100여명 방어 중 한산도로 철수
    · 8.17. 01:00에 통영시내 침입
    · 해군참모총장, 김성은 부대에 거제도 상륙 후 적 격멸 명령 하달
    · 주변 적정 판단 후 통영에 곧바로 상륙 후 적 격멸 명령 하달
    · 8.17. 17:00 통영 공격명령 하달 : 김성은 부대장 해군함정 통합지휘
    · 8.17. 18:00 장평리에 상륙개시
    · 8.18. 05:30 공격개시
    · 8.19. 03:30 망일봉(178고지) 점령
    · 8.19. 10:00 시가행진 실시


▲ 작전 의의
    · 한국군(해병대와 해군)에 의한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
    ·‘귀신 잡는 해병(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의 전통 수립
    · UN군 철수작전 중 방어를 위한 유일한 공격작전
    · 전략적 군 요충지 마산, 진해에 대한 북한군의 해상봉쇄 기도 좌절

▲ 전 과 : 적 사살 469명, 포로 83명, 공용화기 38정, 개인화기 268정 노획

▲ 피 해 : 전사 15명, 부상 47명

▲ 상 훈 : 국방부장관 부대 표창

▶ 경인지구 작전(1950.9.15~10.8)

▲ 인천 상륙작전
    · 인천 상륙작전 계획 수립과정
        - 맥아더 장군의 한강전선 시찰(1950. 6.29.)
            “북한군의 남진을 낙동강을 연한 선에서 저지하는 동시에 절대 우위의 제공/제해권을 이용하여 북한 배후의 요충지인 인천 상륙을 통해 북한군을 협공할 것“을 구상
        - Blue Heart 계획(1950. 7. 4. : 극동군사령부의 최초계획)
            맥아더 장군은‘Blue Heart’계획을 수립하여 1950. 7.22일경 인천에 상륙할 예정이었으나, 지상군이 낙동강전선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는데 실패함으로써‘Blue Heart’계획은 폐기되고, 상륙작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새로운 상륙계획인 ‘Chromite’계획을 수립
        - Chromite 계획(1950. 7.23. : 라이트 장군이 작성한 개략계획)
            9월 중에 미 해병 제1임시여단, 미 육군 제2보병사단으로 3개 지점 중에서 어느 한곳에 상륙
            ·100-B : 인천에 상륙 후 서울, 수원지역을 점령하고, 제8군은 반격으로 전환하여 북한군의 병참선 차단
            ·100-C : 군산에 상륙 후 대전방향 공격, 북괴군의 우측 배후 장악
            ·100-D : 주문진 상륙, 강릉 점령 후 원주로 공격, 북한군의 후방 차단
        - 상륙군 부대 편성계획 변경(1950. 7.29.)
            ·북한군 제6사단 호남 축선 우회기동(마산-부산 축선 위협)
                * 인천 상륙작전의 전제조건 : 부산 교두보 확보
                * 최초 상륙작전 부대인 미 해병 임시 제1여단과 미 제2사단을 낙동강 방어선으로 전용하여 북괴군의 남진 저지 시도
            ·상륙군 부대 변경
                * 미 제2사단→주일 미 제7사단
                * 미 해병 임시 제1여단→미 해병 제1사단
                * 동경회의(1959. 8.23.)
            ·인천상륙작전 반대 이유
                * 부산으로부터 240km 이격된 지역에 유엔군 병력을 분할 운용 시 적에 의한 각개 격파당할 위험 예상
                * 상륙군 편성을 위해 낙동강 방어선으로부터 해병여단을 전용 시 낙동강 방어선 확보 곤란 예상
                * 상륙작전을 위한 선박의 부족으로 인해 제8군에 대한 보급용 선박을 상륙작전을 위해 전용이 불가피
                * 미 제7사단을 상륙군으로의 전용에 따른 일본 방어의 공백 발생
                * 인천의 지리적, 지형적 및 해양적 조건 부적합
                    ※ 육·해군 참모총장은 인천 대신 군산 상륙을 권고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주장한 이유
                * 병참선의 요충인 서울을 측방에서 기습공격
                * 신장된 적의 병참선 차단 가능
                * 서울 조기탈환으로 한 국민에게 정치적 ? 심리적 안정감 부여
        - 미 10군단 창설(8.26.)
            ·미 상륙군 : 미 해병대 제1사단(스미스 소장), 미 육군 제7보병사단
            ·한 상륙군 : 해병대(3개 대대), 육군 제17연대
        - 인천상륙작전 재검토 의사 타진 : 미 합참 2회(9. 5./9. 7.)
        - 미 합참 최종 승인(9. 9.)
    · 인천상륙작전 경과
        - 상륙군 임무
            ·인천항만의 확보, 해안두보 점령
            ·가능한 신속히 진출, 김포 비행장 확보
            ·한강 도하, 수도 서울 탈환
            ·미 제8군과 연결 작전
        - 한국 해병대 임무
            최초 사단 예비가 되어 대기파로 적색해안에 상륙하여 미 제5해병연대와 협조, 인천 시가지 점령 작전 실시
        - 준비 작전
            ·8월 초
                * 순양함, 구축함, 항모 : 동해안에서 활동, 낙동강 방어선 항공/함포 지원
                * 소함정 : 서해안에서 활동, 해안 봉쇄/보급 차단
            ·8.18. ~ 9.10 : 서해안 도서 상륙 덕적도, 영흥도, 연평도 등
                * 8.18. 한국 해병대 덕적도 상륙
                * 8.20. 한국 해병대 영흥도 상륙
                * 9. 6. 한·미 해병대 최초 합류(형제 해병 인연)
                * 9.11. 한·미 해병대 최초 회의
            ·9.12. : 서해안 폭격
            ·9.13. ~ 15. : 적 방어선, 교통시설 파괴(함재기 200대)
                ※ 인천 상륙작전 기만 활동
                    ① 미 ? 영 소규모 특공대 군산 상륙(9.12.)
                    ② 진남포, 삼척, 원산일대 동일 규모의 함포 사격(9.13.)
                    ③ 군산을 모형으로 한 공개적 예행연습
                    ④ 군산 해안의 주민 철수를 종용하는 전단 살포(9.14.)
                    ⑤ 군산 주위 50km 지역 항공폭격(9.14.)
                    ⑥ 동해안 장사동 일대 한국군 특공대 상륙(9.14.)
                    ⑦ 미 매스컴 보도 : 10월 이후 반격/인천 상륙작전 실시
        - 상륙작전
            ·9.12. : 261척의 대규모 수송선단, 인천으로 출발
            ·9.15. : 작전 개시
                * 제1단계 작전 (월미도 탈환)
                    ① 05:00 함재기 월미도 폭격 개시
                    ② 05:30 순양함 포격 실시
                    ③ 06:30 미 해병 제53대대 녹색해안 (월미도) 상륙
                    ④ 07:59 제1목표 탈환 (월미도)
                * 제2단계 작전 (인천 해두보 확보)
                    ① 17:32 미 해병 제1연대 청색해안 상륙 개시
                    ② 17:33 미 해병 제5연대(-) 적색해안 상륙 개시
                    ③ 18:00 한 제1해병연대 적색해안(만석동) 상륙
            ·9.16. : 인천 시가지 소탕전
                * 한국 해병대 인천 시가지 소탕작전 참가
                * 01:30 미 해병 전방연대 인천 해안두보 완전 확보
                    ※ 미 해병 제5연대 : 인천 시가지 소탕작전을 한국군 해병대에 인계 후 김포방향으로 진격
            ·9.17. : 한 ? 미 해병대 부평으로 진격
            ·9.18. : 미 해병 제5연대 김포 비행장 확보, 미 제7사단 제32연대 인천 상륙
            ·9.20. : 미 해병 제5연대와 한국 해병대 한강(행주) 도하


    · 작전 결과
        - 적의 주 병참선/퇴로 차단으로 전쟁의 주도권 UN군으로 급전
        - 적 후방지역에 대한 상륙실시로 UN군의 인적, 물적, 시간적 손실 최소화 효과 달성
        - 상륙전 측면에서의 의의
            ·상륙작전의 가치와 해군/해병대의 상륙작전 수행능력 과시
            ·해병대의 필요성 재인식
                * 미 합참의장(브래들리) 9개월 전 불필요 주장
            ·상륙전 교리의 타당성 증명
        - 인천상륙의 영향(각국)
            ·미국
                * 전쟁목적 변경 : 전쟁 이전 회복→한반도 통일
                * 상륙작전에 대한 중요성 인식
            ·북한
                * 전투의지 마비(痲?), 작전 주도권 상실
                * 자체 전쟁수행 불가 : 중공군 작전지원
                * 상륙작전 저지 방법 강구 : 원산 상륙작전 시 방어
            ·중국
                * 6·25전쟁 참전 결정
                * 전쟁기간 중 상륙작전에 대비
    · 교훈
        - 상륙작전에 대비한 해군/해병대의 전문화 유지 필요성
        - 새로운 상륙전 교리 및 기술/장비 개발의 필요성 대두
        - 상륙작전 시 기습효과 달성의 중요성 입증
        - 전술정보의 확보 필요성 대두
        - 신형 상륙함정의 필요성 대두

▲ 서울 탈환작전
    · 104고지 전투
        - 작전기간 : 1950. 9.21. ~ 9.22.
        - 작전지역 : 서울 수색
        - 적군 : 미상, 아군 : 해병대 제1대대
        - 상황
            ·9.15.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한 아군은 곧바로 인천을 장악한 후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을 향한 진격을 시작하여 9.17. 부평, 9.19. 소사 및 영등포, 9.21 김포 및 강화도에 진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아군은 공격기세를 살려서 적을 격파하고 서울을 향한 진격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기간 중에 나타난 적의 저항은 집요한 것이었고, 아군의 손실 또한 적지 않아서 고전하였으나 대세는 이미 적의 패주로 기울어지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당시 공격부대 상황
                * 미 해병 제1연대(대령 풀러) : 영등포 방면에서 계속 분전
                * 미 해병 제5연대(중령 머레이) : 9.20. 새벽 행주 나루터에서 한강 도하 후 서울 서측방에서 압력을 가함.
                * 한 해병대(대령 신현준) : 9.10. 00:30경 수색을 무혈점령 후 104고지 선까지의 진출 시도
        - 작전 경과
            ·공격부대 편성
                * 한국 해병 제1대대(소령 고길훈) : 중앙 담당
                * 미 해병 제5연대 1대대(중령 뉴턴) : 우측 담당
                * 미 해병 제5연대 3대대(중령 타플렛) : 좌측 담당
            ·경 과
                * 9.21. 14:00 공격 개시
                * 9.21. 18:30 한국 해병 제1대대 104고지 완전 장악
                * 9.22. 04:00경 적 역습
                * 9.22. 07:00경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적 역습 격퇴
        - 교훈
            ·효과적인 공격준비사격 및 연막차장으로 불리한 지형 조건 극복
            ·인천상륙작전 이후 지속된 공격기세 유지 및 강열한 적 격파 의지
    · 연희고지 전투
        - 작전 기간 : 1950. 9.22. ~ 9.24.
        - 작전 지역 : 서울 서대문구 연희고지(66고지)
        - 적군 : 북한군 제25여단 및 제78독립연대
        - 아군 : 미 해병 제1사단 5연대, 한국 해병 제1대대
        - 상황
            ·104고지를 점령한 한국 해병대의 제1대대는 중앙에서 연희고지를 향해 진격의 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좌측의 미 해병 제5연대 3대대는 29고지(안산)를 목표로 우측의 미 해병 제1대대는 철로를 횡단하여 서교동의 105고지를 목표로 하여 각각 공격을 강행하게 되었다.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적의 강력한 방어진지가 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이 고지 일대의 지형은 서울 북쪽의 338고지 (인왕산)에서 남서로 295고지가 있으며 이 고지 남동쪽에 3개의 105고지와 연희고지를 중심으로 한 좌우 전후에는 나지막한 능선을 이루었으며 또 이화여대에서 아현동으로 뻗은 일련의 능선은 마치 활 모양의 지형을 형성하고 있었다.
            ·적은 예측한대로 338고지와 105고지에 이르는 일련의 능선상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총력을 집중하여 방어하면서 결코 서울을 아군의 손에 넘기지 않으려고 발악하였다.
        - 작전 경과
            ·9.22. 07:20 공격 개시
            ·9.23. 한국 해병대 제1대대와 미 해병 제5연대 2대대와 임무 교대 후 104고지 집결 부대정비 실시
            ·9.24. 미 해병 제5연대 2대대 연희고지 점령
        - 교훈
            ·적을 알고 나의 능력을 파악 후 대처
            ·불타는 의지와 용기만으로 싸움에 이길 수 없음
            ·고도의 전기전술 연마 중요성 인식
    · 서울 시가전
        - 9.25. 한미 해병대 서울 돌입/시가전 개시
        - 9.26.
            ·한국 해병 제2대대 + 미 해병 제1연대 : 서울역 일대
            ·한국 해병 제1대대 + 미 해병 제5연대 : 서대문 4거리 일대
            ·한국 해병 제5대대 + 미 해병 제7연대 : 서울 북쪽 외곽
                * 서울시청에 태극기 게양(제2대대 6중대 1소대장 소위 박정모)
        - 9.27. 중앙청에 태극기 게양(제2대대 6중대 1소대장 소위 박정모)
        - 9.28. 한국 해병대, 중앙청 및 경무대(현 청와대)의 경비임무를 한국 육군 제17연대에 인계
        - 9.29. 수도서울 환도식(還都式) 거행(12:00)
            * 한국 해병대 : 수도 서울 환도식 간 식장 경비
    · 북한강지구 전투
        - 9.29. 한국해병 제1·2대대, 미 해병대 배속 해제 원대복귀 후 서울 치안 담당
        - 9.30. 서울방어를 위해 북한강 지역으로 출동(서울 동쪽지역 차단 임무)
        - 10. 1. 한국 해병 제5대대 원대 복귀, 미 해병대 항공/함포 연락 장교(65명) 해병대사령부 도착
        - 10. 2. ~ 5. 북한강 지역 및 금곡 완전 회복, 제10군단의 진출예정선 확보
        - 10. 6. 해병대 사령부 집결(인창리 일대)
        - 10. 7. 해병대 전 부대 인천 집결, 차기 작전 준비
            ·제1대대 : 묵호방면 전투 참가
            ·제2대대 : 목포지구 잔적 섬멸작전 참가, 5대대 : 원산 상륙작전 참가
    · 의의
        - 함락된 수도 서울 조기 탈환으로 국민의 사기 진작
        - 낙동강 전선의 총 반격여건 조성 및 북진 개시
        - 해병대의 위대한 업적 창조


▶ 도솔산지구전투(1951.6.4 ~ 20)

▲ 전 황
    · 작전 지역 : 강원도 양구 도솔산 일대
    · 참가 부대
        - 적군 : 북한군 제12사단
        - 아군 : 해병 제1연대(대령 김대식)

▲ 작전 경과
    · 1단계 작전(1951. 6. 4. ~ 6.12.)
        - 6. 3. 한국 해병 제1연대, 미 해병 제5연대와 임무 교대
        - 1단계 작전 개시
        - 6. 4. 공격 개시(08:00)
        - 6. 5. ~ 6.10. 교전 계속, 야간공격 전환 결심
        - 6.11. 무조명 무지원하 야간공격 실시(02:00)
            * 공격 3시간 만에 적의 주 저항선 돌파 후 전과확대로 전환
        - 6.12. 캔자스선 확보
    · 2단계 작전(1951. 6.13. ~ 6.20.)
        - 6.14. 도솔산 공격명령 수령
        - 6.15. 공격 개시
        - 6.16. 도솔산 공격 근거 확보(목표“17”,“18”,“19”점령)
        - 6.18. 도솔산 주간공격 실패, 야간공격 전환(3대대)
        - 6.20. 목표“24”점령(04:00, 제3대대 10중대)

▲ 작전 의의
    · 적의 전략적 요충지인 만대리 해안분지(일명‘Punch Bowl')를 남쪽에서 통제 가능
    · 양구-인제 양 측방 주보급로 확보로 우군 전선의 활로 개척 및 주요고지 장악
    · 가칠봉(현재의 휴전선)을 연하는 선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 마련
    · 미 해병대가 실패한 난공의 고지를 탈환하여 한국 해병대의 용맹성 과시
    ·“무적해병”의 찬란한 전통 수립

▲ 승리 요인
    · 적을 압도하는 해병대 특유의 감투정신과 인내력
    · 지형의 적절한 이용과 과감한 야간전투
    · 항공 및 포병의 효과적인 화력지원

▲ 전투 결과
    · 전과 : 적 사살 3,000여명, 포로 44명, 귀순 7명, 공용화기 75정
    · 피해 : 전사 123명, 부상 400여명

▲ 상 훈
    · 미국 은성 및 동성 무공훈장 수상
        * 대령 김성은, 대령 김대식, 대대장, 통신대장 수상
    · 대통령 표창 및 훈?표창장 수상, 한국 국회의 감사문 전달


▶ 김일성/모택동고지전투(1951.8.30 ~ 9.3)

▲ 개 황
    ·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개최(1차 본회담 1951. 7 10.)
    · 소규모 정찰전 실시
    · 김일성? 모택동고지는 펀치볼의 일부 중동부 전선의 요지
    · 북한군 제3군단 제1사단 3연대로서 924고지에 1개 대대, 1026고지에 약 1개 대대, 후방에 예비로 1개 대대 배치
    · 견고한 방어진지 구축 및 천문학적 지뢰 매설
    · 적개심 고취로 목표를 반드시 탈취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높이기 위해 김일성, 모택동 고지로 명명

▲ 개 요
    · 작전 지역 : 양구 북방 만대리 분지일대의 924, 1026고지(3)
    · 참가 부대
        - 아군 : 제1해병연대(연대장 : 중령 김동하)
        - 적군 : 북한군 제1사단 3연대

▲ 작전 경과
    · 8.26. 출동
    · 8.29. 캔자스선에서 미 해병대와 임무교대
    · 8.31. 월산령에 집결 후 공격개시, 연대장(김대식 대령) 부상.
    · 9. 1. 07:00 재차 공격시도
    · 9. 1. 20:00 김일성고지(▲924) 점령
    · 9. 2. 15:00 모택동고지(▲1026) 공격
    · 9. 3. 13:45 모택동고지 점령

▲ 전투 결과
    · 전과 : 적 사살 701명, 포로 244명, 공용화기 71정, 개인화기 324정
    · 피해 : 전사 183명, 부상 717명

▲ 작전 의의
    · 펀치볼을 장악함으로써 중동부전선의 전술적 요충지 확보
    · 대규모 연합(펀치볼) 1단계 작전 수행
    · 적의 본거지인 내금강산의 유리한 지형 확보에 기여
    · 휴전회담 재개로 휴전선의 유리한 지형 확보에 기여
    ·“임전무퇴”의 전통 수립 : 국내·외 크게 과시
    ·“신인(神人)이 경탄할 공훈”이라고 이승만 대통령이 격찬


▶ 장단(사천강)지구전투(1952.3.18. ~ 1953.7.27.)

▲ 개 황
    · 1952년 초 수도서울 방위에 역점을 둔 미8군의 전선 부대 재배치
    · 개성~판문점~문산지점 및 이를 통과하는 도로 중립화
        - 개성문산도로 양측 200m 이내 지역에서 전투행위 제한
    · 1952. 3.17. 제1연대, 부대이동 펀치볼→파주군 적성면 장연리 도착
        - 제1연대, 미 해병 제1사단과 함께 중동부 전선에서 차량 편으로 장단지구로 이동하여 김포지구의 독립 제5대대와 연계하여 수도권 방어
    · 1952. 3.20. 사천강 동쪽 한 육군 제1사단 15연대 지역 인수 배치
    · 임진강·사천강·한강 하류와 개성~서울 가도 방어
        - 휴전 회담장(판문점) 중심 반경 1Km 이내 지역으로 서측 방호의 중요성 부각

▲ 개 요
    · 작전 지역 : 경기도 파주군 사천강 일대
    · 참가 부대
        - 적군 : 중공군 제65군 예하 제194·195사단
        - 아군 : 해병대 제1연대(이후 해병대 제1전투단으로 증편)

▲ 작전 경과
    · 1차 전투(1952. 4. 1. ~ 6.29.) : 연대장 김동하 대령을 필두로 중공군의 2차에 걸친 기습공격과 3회의 야간공격을 막아냄
    · 2차 전투(1952. 9. 6. ~ 19.) : 김석범 대령은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라는 기치 아래 적 대대 규모의 공격을 역습으로 격퇴/중공군 공격 기세를 꺾음
    · 3차 전투(1952.10. 2. ~ 10. 7.) : 수도권 방어 임무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제1전투단으로 보강, 김석범 준장의 지휘아래 중공군 공격을 유인역습 작전으로 격퇴
    · 4차 전투(1952.10.31. ~ 11. 1.) : 김성은 대령이 중공군의 대규모 2차 공세를 저지하여 적의 전투의지 상실 및 반격작전으로 최대의 전과 획득



▲ 작전 결과
    · 전과 : 적 사살 14,017명, 포로 11,011명, 포로 42명
    · 피해 : 전사 776명, 부상 3,214명

▲ 작전 의의
    · 군사분계선을 아군에 유리하게 확정짓는데 기여
    · 불리한 지형적 조건에서 16개월간 장기간의 방어 임무 완수/전초기지 작전 수행
        * 해병대 전투 중 가장 장기간의 전투
    · 개성-문산 축선을 지켜 수도권 방어에 기여
    · 한국전 종료 시까지 한국 해병대가 명시된 임무 수행→차후 해병대 확대 개편의 계기

▲ 상 훈 : 대통령 부대표창, 국회의장(민의원) 감사장
▶ 양도작전(1952. 2. 20. ~ 21.)

▲ 서해 도서작전
    · 독립 제41중대(중위 이동호)
        - 1951. 4. 2. 독립 제41중대 편성, 교동도 상륙
        - 1951. 4.23. 백령도 상륙
        - 1951. 5. 7. 석도 상륙
            ·첩보수집활동을 위한 거점 확보
            ·유격활동을 전개하여 적 후방 교란 가능
            ·반공유격대를 조직하여 구월산에 투입시켜 적 군사행동에 타격
    · 해병 도서부대
        - 1952. 1.15. 해병 도서부대 편성


        - 1952. 1.18. 연평도 상륙(소대급)
            ·도서경비 및 민심수습
            ·서해안(해주항) 해상 봉쇄
            ·애국청년 반공유격대 지원
        - 1952. 1.20. 백령도 상륙
        - 1952. 1.22. 초도 상륙(중대급)

▲ 동해 도서작전
    · 독립 제42중대(중위 심희택)
        - 1951. 2. 5. 독립 제42중대 편성
        - 1951. 2.14. 여도 상륙
                2.24. 신도 상륙
                2.25. 대도 상륙
                3.14. 황사도 상륙
        - 의의
            ·원산항 봉쇄, 적의 해상진출 저지
            ·적의 보급선 차단
            ·탄착수정, 첩보획득, 조종사 구출
    · 독립 제43중대(중위 최청송)
        - 1951. 8. 독립 제43중대 편성
        - 1951. 8.28. 04:30 양도에 무혈상륙
            ·목적
                * 원산항 봉쇄 이후 해상 봉쇄선 연장 및 적의 후방 위협
                * 첩복공작을 실시 차기작전에 대비
    · 양도작전
        - 작전 기간 : 1951. 8.28. ~ 1952. 2.25.
        - 참가 세력
            ·아군 : 독립 제43중대(중위 최청송)
            ·적군 : 북한군 총사령부 직속 독립 제63보병연대 특별 대대
        - 작전 경과
            ·1951. 8.28. 한 해병대 독립 제43중대 양도상륙
            ·1952. 2.20. 전반야에 북괴군은 목선(어선) 52척, 발동선 2척으로 길주양도, 명천양도에 기습상륙
            ·제43중대 1소대(명천양도)는 적 발동선 2척 격침
            ·적 주력 길주양도 70고지 및 명천양도 47고지 점령
            ·제43중대 고지를 둘러싼 섬 주변 호 속에 포진하여 진지 사수
            ·적은 명천양도 출신 첩보원 안내로 아 진지 공격, 아군은 집중 응사로 적을 고지에 집결
            ·2.21. 05:20 적 소기목적 포기하고 범선으로 도주 시작, 아군은 집중사격으로 적 선박 격침 및 적 섬멸
            ·아군 육박전으로 길주양도 70고지 탈환
            ·1952.10. 5. 부대개편 계획에 따라 양도부대로 개칭
        - 전투 결과
            ·전과 : 적 사살 83명, 익사 73명, 포로 14명, 15척 선박격침
            ·피해 : 전사 8명, 실종 2명
        - 작전 의의
            ·적 대대 상륙을 유인 기습공격으로 격멸
                * 중대장(소대장)의 독단 지휘능력 탁월
            ·동해상 전략도서 확보로 해안 봉쇄선 연상 및 적의 후방 위협
        - 상훈
            ·미국의 은성 및 동성 무공훈장 수상(각 1명)
            ·국내 을지·충무·화랑 무공훈장 수상(41명)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 찬사
▶ 짜빈동 작전(1967.2.14. ~ 15.)

▲ 개 요
    1967년 2월 14일 23:30시, 북베트남 제2사단 1연대와 베트콩 게릴라는 손틴군 짜빈동에 위치하고 있던 청룡부대 제3대대 11중대 기지에 대해 야포와 유탄포 500여발을 포격하면서 인해전술로 진지에 돌입하였으나 우리 해병대는 간단없는 포병 지원하에 각개 해병의 용맹성과 임전무퇴의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적을 막아내고 진내에 돌입한 적에 대하여 역습부대를 운용하는 등 4시간의 사투 끝에 베트남전 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리며 중대병력으로 적 연대의 공격을 격퇴·격멸하여 ‘신화를 남긴 해병대’의 전통을 수립

▲ 참가 부대
    · 적군 : 북베트남 정규군 제2사단 1연대, 지방 게릴라 1개 대대
    · 아군 : 청룡부대 제3대대 11중대

▲ 작전 경과
    · 2.14. 23:20 적 척후병 접근/철조망 파괴
    · 2.15. 04:00 적 본대 공격개시
    · 2.15. 06:00 적 퇴각

▲ 작전 결과
    · 전과 : 적 사살 243명, 포로 2명, 공용화기 11정, 개인화기 36정
    · 피해 : 전사 15명, 부상 33명

▲ 승리 요인
    · 중·소대장의 탁월한 전투지휘
    · 각개 해병대원의 용전분투
    · 지원화기의 시의적절한 운용 및 역습부대의 과감한 공격

▲ 의 의
    · 적 연대 병력 격파로 해병대의 전투력을 국내·외에 과시
    ·‘신화를 남긴 해병’전통 수립
    · 1967. 3.14. 대통령 부대 표창
    · 전 중대원의 일계급 특진(장교 제외),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
    · 중대장(정경진 대위), 1소대장(신원배 소위) 태극무공훈장 수상
    · 해병대 7대 작전으로 전사에 기록
    · 미 해병 제3상륙군사령관 월드 중장의 격찬
        *“내가 베트남전에서 처음 보는 전과다. 전 장병의 용감성은 우방군의 귀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