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로고 태극기

해병대 70년사

  • 창설기
  • 6.25 전쟁기
  • 전후 정비기
  • 베트남 파병기
  • 시련과 도약기
  • 재창설기
  • 기반조성기, 현재
      
해병대 창설(1949.4.15.)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리적여건과 여-순사건의 전훈에 따라 상륙작전을 수행할 부대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비행장 에서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진주 주둔(1949.8월 ~ 12월)
해병대 김성은 부대(약1개 대대)는 1949년 8월 29일 진주로 이동하여 약 4개월 동안 진주에 주둔하면서,'백성없이 전투 없다'는 표어 아래 치안확보, 민심수습, 선무공작 활동들을 전개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온갖 노력을 경주하면서 지리산을 근거지로 진주지역 일대에 출몰하는 공비소탕작전을 실시하여 진주지역을 완전히 평정함으로써 해병대의 존재를 처음으로 국민에게 과시하였다.

해병대 군가 제정(1949.9월)
창설 초기 해병대 특유의 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간부들의 의견이 대두되자, 해병대 참모장 김성은 중령을 위원장으로 1949년 9월에 군가제정위원회에서 신영철 해병이 작사한 초고를 수정하고 김형래(당시 경찰악대장)씨가 작곡하였으며 이를 이병걸씨가 군악으로 편곡한 '나가자 해병대' 가를 최초의 해병대 군가로 제정하였다. 이는 6.25전쟁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해병혼' 과 해병대 정신'을 다지는 해병대 군가로 불리고 있다.

제주도 주둔(1949년 12월 ~ 1950. 9월)
해병대는 1949년 12월 28일 진해와 진주에서 제주도로 이동하여 제주읍 부대와 모슬포 부대로 증편, 한라산을 중심으로 준동하는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제주도는 4.3사건 뒤 전화가 회복되지 않았으며 군에대한 원한과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초기에는 토벌작전보다 선무공작과 민심수습으로 의료 및 진료, 시설 복구, 농번기 대민 지원, 주민 계몽활동을 실시하여 물심양면으로 피폐한 30만 도민에게 재기의 힘을 돋우는 한편, 생활면에서 안정을 되찾도록 인도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해병대는 육군 제9연대와 2연대, 철도경찰대, 서북청년단등이 토벌하지 못한 한라산 공비를 소탕할 수 있었다.

창설기 교육훈련
신현준 사령관은 창설 당시 훈시를 통하여 정병육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교육훈련 이념을 제시하였다. 첫째,'해병대는 일치단결하여 유사시를 대비하여 교육훈련에 정진하자', 둘째,'민에는 양이 되고 적에는 사자가 되자', 셋째,'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자유를 수호하는 역사를 창조하자'고 하였다. 창설기에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강인한 훈련의 연속으로 '해병혼'과 '해병대 정신'을 주입하였으며, 그결과 6.25전쟁시 상승불패의 해병대 전통을 수립하는 초석이 되었다. 특히 정신적, 육체적 도장으로 삼아왔던 천자봉 구보와 행군은 오늘날까지 해병대 장병들에게 긍지를 가지게 하는 훈련으로 그맥을 이어오고 있다.
      
해병대와 6.25 전쟁
해병대는 창설된지 불과 1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 하자 장항.군산.이리지구에 투입되어 적의 남진을 지연시켰고 진동리지구 전투에서는 전장병 1계급 특진의 빛나는 영예를 차지하였으며 통영상륙작전에서는 '귀신잡는 해병대'라는 영원한 애칭을 얻는 등 연전연승하였다. 특히 북괴군의 발악적인 최후 공격으로 낙동강 전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 해병대는 동년 9월 15일 한반도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에 미 제1해병사단과 같이 참가하여 북진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9월20일 부터 수도 서울 탈환작전을 감행하여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수훈을 세웠다. 인천해서 함정으로 원산/함흥지역으로 이동, 분전하던 해병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수하였고, 1951년 1.4후퇴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전을 실시할 때 북진하던 중 적의 철옹성과 같았던 도솔산과 펀치볼 일대를 공격, 이를 탈취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으로 부터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 받고 '신인이 경탄할 공훈'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한편 해병대는 1951년 2월 부터 동.서해안 전략도서 확보작전을 수행하여, 휴전 뒤 서해 5개 도서를 아군의 통제하에 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2년 3월 중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으로 이동한 해병대는 장단(사천강)지구 전투를 1년4개월 동안 수행하면서 중공군의 인해전술 공격을 격퇴하고 현전선에서 휴전을 맞이하였다.
      
교육단 창설(1953.2.1.)
6.25전쟁 기간중 교육훈련의 중요성을 절감,독자적인 해병대의 장교,부사관,병을 양성하기 위하여 해병학교 및 해병훈련소를 기간으로 해병 교육단을 창설하여 상륙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해병대식 교육훈련으로 강인한 해병을 창출하는 산실 역할을 수행하였다.

제1여단 창설(1954.2.1)
제1전투단을 기간으로 제1여단을 창설하여 파주군 금촌면에 주둔하면서 상륙작전부대로서 조직을 정비하고 서부전선 및 수도권 방어 임무를 수행 하였고, 1954년 3월 17일 미 해병대 제1사단의 본국 철수로 작전지역 작전권을 인수하였다.

제1상륙사단 창설(1955.1.15)
제1여단을 기간으로 제1상륙사단을 창설하여 수도권 방어 임무를 수행하면서 상륙훈련을 실시하였고, 1959년 3월 28일 에는 파주 금촌에서 포항으로 이동하여 상륙작전임무를 본격적으로 수행하였다. 1959년 3월 30일 대통령령 제1468호에 따라 제1상륙사단으로 개칭하였다가 1973년 10월10일 제,1해병사단으로 부대명칭이 변경되었다. 제1사단은 국가 유일의 전략기동 부대로서 완벽한 출전준비태세를 유지하다가 유사시 동.서해안에 상륙작전을 실시하는 부대로서, 북괴군 5개 군단을 고착,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해병대사령부 서울 용산으로 이동(1955.3.26.)
1949년 4월 15일 진해에서 창설한 후 6.25전쟁이 발발당시

      
배트남 파병기
1965년 8월 13일, 정부와 국회는 북베트남 침략에 직면한 자유베트남 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하여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파병부대로 제2여단(청룡부대)을 창설하여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전투부대로는 최초로 외국 원정군으로 파월하였다. 캄란에 상륙한 청룡부대는 투이호아지구,추라이지구,호이안지구 전투를 수행하면서,6년5개월 도안 짜빈동 작전등 수많은 전투를 통하여,조국의 명예와 해병대의 용맹성을 발휘하여 '신화를 남긴 해병대'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해병대사령부 해체(1973.10.10)
군은 유신과업 수행을 위한 군 본연의 사명을 충실히 완수하고, 전투력 위주로 정비를 강화하여 자주국방 태세를 조속히 확립하며, 국가 자립경제발전을 위해 경제적으로 군을 관리운영하기 위하여 대통령 분부사항(1973.5.29.) 및 해벼대 운영개선에 관한 국방부 훈령 제 157호(1973.7.10.)에 의거, 해병대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전투부대를 제외한 해병대 사령부와 교육 및 지원부대를 해군에 통폐합시켰다.
      
해병대사령부 재창설(1987.11.1)
경제적 군 운용이라는 미명하에 해병대사령부 및 교육, 군수지원부대가 해체되어 해군에 14년간 통합 운용된 해병대는 전력관리의 문제점이 나타나 상륙작전에 관한 지휘구조를 개선할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해병대 부대를 통합 지휘할 해병대사령부를 재창설하였다.
      
상륙지원단 창설(1994.4.4.)
1977년 1월1일 부로 제1해병사단 해안지원단으로 창설되었다가 1994년 4월4일 해병대사령부 직할부대인 상륙지원단을 창설하였다. 이후 2014년 2월 4일부로 해병대 군수지원단으로 개칭되었다가 2015년 4월 6일 부로 해병대 군수단으로 개칭되어 전평시 해병대 전 부대에 대한 군수지원 전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